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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순히 좋아하는 것을 만들지 못 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비교의 의미에 가까웠다.

    느린 노래보다 빠른 노래가 좋다던가, 개보다 고양이가 좋다던가, 문학보다 수학이 좋다던가. 그런 비교의 개념에서의 『좋아한다』라면 몇 가지라도 늘어놓을 수 있었다. 그만큼 "네가 좋아하는 것"을 묻는 질문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는 무언가에 '호(好)'의 감정을 가진 적이 있었나, 부터 고민해야 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답은 언제나 해를 찾지 못한 채 무중 속에서 흩어지고는 했다. 나조차 아직 찾지 못했던 그 대답을, 내내 기다려주는 사람도 당연히 없었다. 애초에 그런 질문을 건네는 사람들은 대체로 형식적일 뿐이었으니까.

    개인정보나 학교 기록에 남기기 위해 받은 단 몇 번의 질문은, 멍하니 수많은 생각들을 흘려보낼 때 문뜩 떠오르고는 했다. 싫어하는 것을 찾으라면 몇 가지 골라낼 수 있었지만, 좋아하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정말로 그것을 좋아하고 있는지, 이것이 감정이 맞는지,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맞는지 생각하다보면 흐지부지 사라지는 것이 '호(好)'의 무언가였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 질문을 끌어올린 것은, 그만큼 그 답을 찾아헤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모르는 것을 향한 탐구, 그것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모르니까, 그것을 알기 위해 반복해서 묻는 것 뿐이다.

    좋아하는 것이 있는지.

    그것을 좋아하는지.

    네가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결국 확신하지 못한 나는, 다시 무지한 상태로 이것은 어떠냐며 선택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수십개의 오답지는 그저 관찰일기에 불가할 뿐, 감상문이 아니었다. 타를 향한 나의 감정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 * *

* * *

    '호(好)'의 감정을 알기 위해서, 그 중 가장 크고 깊은 감정인 '애정'을 갈구하는 발자취를 따라온 곳은 여러 형태의, 여러 사람들의 감정이 있었다. 그 안에도 역시나 나의 것은 없는 듯했다. 이 안에 내 감정이 될 것이 있지 않을까 찾으며 돌아다니고 귀를 기울이고 눈을 흘기면, 제각기 비교하여 다시 '보다 좋은 것'들의 향연이었다. 실력이나 연습량 같은, 눈에 보이고 이미 나누어져 있는 기준들. 그것들을 납득하는 것 외에는 큰 자극도 없었다. 계산적으로 세워진 현실이란 벽에 부딪치는 이들을 보는 것도 그저 '처절하다'라는 판단 뿐. 좋은 풍경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동정하거나, 안타까워 하지는 않았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그 처절한 무대 위에서 웃었기에, 오히려 알 수 없음만 더할 뿐이었다.

 

    기억력이야 원래 좋으니까, 그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이라며 찾는다해도 사실판단의 일부였을 터였다.

    처음 즐겁다고 생각했을 때, 그저 돌아봤을 때 보이는 얼굴이 즐겁다고 말하고 있어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비슷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것들은 그저, 같은 선상에 서있는 이들의 감정이 '전이'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느끼며 가진 감정들이 내 것인양 옮아 붙어앉은 것뿐, 그것이 내 감정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착각에 빠질라 싶으면 멍하니 생각을 흩어놓을 때 문뜩 내면이 나에게 물었다.

    그것들이 정말 온전히 네 것일까?

    난,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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